모든 이들의 꿈/만화

<특공도> 자살 폭탄을 짊어진 에이지로우

감기군만쉐 2017. 11. 27. 19:02


2000년대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 중 하나가 <헬로우 블랙잭>이었다. 어떻게든 환자를 살리고 싶어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에이지로우와 이를 가로막는 일본 의료계의 병폐들이 대립하면서 처음엔 외과 쪽 수련의였지만 대립으로 인해 이 과 저 과를 전전하게 된다는 설정 하에 일본 의료계의 여러 모습을 비추었던 작품으로 실제 의료계 종사자들도 많이들 선호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13권까지 나왔지만 그 이후 나온 2부는 저작권 문제가 엉킨 건지 어디에서도 내지 않았고 나도 1부 12권까지만 보다가 멈춘 상태여서 13권에 이어 2부까지 보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왠지 좀처럼 13권을 볼 생각이 들지 않아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오늘 문득 이 작품이 다시 생각나서 찾아봤다. 그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가라면 후속작도 내고 했을 텐데 좀처럼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싶어서 작가 이름으로 찾아봤더니 이런 책이 나왔다.














특공도(特攻の島). 일단 그림체를 보아서는 같은 작가가 맞는 것 같고 아마존 재팬에서 찾아본 결과에서도 같은 작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헬로우 블랙잭>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짐작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야기였다. 이 배경으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하고 작품 설명과 평들을 보아하니 특공대가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감을 못 잡겠다 싶어서 이걸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1권이 무료로 공개되어 있는 곳이 나와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이 작품이 뭘 말하려는 건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항공기 부대에 입대한 주인공이 인간어뢰에 타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여태까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자폭부대 하면 카미카제밖에 몰랐기 때문에 혹시 카미카제를 바다에 응용시킨 설정인 건가 했는데 멸사봉공의 정신에 불타는 일본군이 어뢰에도 이런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해전 장비가 발달함에 따라 쓸모가 없어진 어뢰에 사람을 태우고 돌진하는 무선 유도(?)어뢰 카이텐을 개발했던 것이다. -ㅁ-; 그리고 이것을 다룬 만화를 그린 사람이 <헬로우 블랙잭>을 그린 사람과 동일인물... 일단 마음을 다잡고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파악하기로 했다. 무식하게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라 그런 식으로 그리지는 않았을 테니 전쟁의 잔혹함과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그런 만화가 그려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개 자체도 주인공은 그런 국가주의의 물결과는 결을 달리했기 때문에 마냥 그런 식으로 그려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어본 결과 마냥 그런 식으로 그려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만화 처음엔 카이텐을 고안한 두 사람이 나와서 말도 안 된다며 무시하려는 상관에게 나라를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이 구도도 꽤나 고의적이다...) 그런데 나중에 주인공이 자폭부대에 들어간 뒤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상당히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오고 주인공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공은 카이텐을 만든 것도 모자라 여기에 자신도 타고서 자폭공격을 가하려 하는 이유가 뭔지를 계속해서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1권 막판에 이 이유가 나온다. 초반에만 나오고 계속 나오지 않았던 사람은 부대가 창설되기 전에 카이텐을 운전하다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침몰한 카이텐 안에서 공기가 다하기 전까지 이 사고가 일어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적은 유서를 남긴 것도 모자라 카이텐 안에 무수한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지는 문장을 써놓았다. 남은 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서 감명을 받은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고...

주인공 쪽은 아버지와 형이 앓아누운 가난한 집안에서 동네의 잔반을 모아 돼지를 키워 간신히 가족을 먹여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가 동네 사람에게 얻어맞고 "너희 아버지나 형은 아무 것도 안하고 있잖냐 비국민아"를 듣고서 군대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림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입대하기 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를 주지만 전장에서 그릴 만한 것을 찾지도 못하고 결함투성이 카이텐을 타야 되는 것에 개죽음이나 다를 바 없지 않냐고 실망하고 있던 차에 위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자신이 자신으로서 살기 위해 카이텐을 타겠다고 결심한다.

1권을 다 보고 나서 뭘 더 볼 게 있나 싶다. 이런 어이없는 공격에 희생된 목숨들을 영광스러운 순교자라고 말하고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헬로우 블랙잭>을 그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에이지로우가 의사를 못하게 되자 병원에 자폭 테러를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의사 만화 하나 그렸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참고로 이 작품은 아마존 재팬에서 전권이 별 4개씩을 받고 있다. 이게 평균적인 일본인의 가치관인 건지...

그냥 계속 알아보지 않는 게 옳았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알았어야 했던 것일까? 혼란스럽다.


*한국에선 이 작품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건지 검색을 해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헬로우 블랙잭>을 본 사람들 중에서 이 작가가 후속작으로 뭘 그렸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그렇게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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