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극히 개인적인 생각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천만 관객 영화=천만 시민 투표

감기군만쉐 2017. 10. 24. 18:16


<끝이야기 상> 중에서


<시사IN>에서 장정일 작가가 천만이 보는 영화와 천만이 뽑는 투표를 동일시하며 자신은 더이상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천만 관객 영화에 여성은 없다) 이 기사를 봤을 당시 영화와 투표를 동일시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과 반발감을 가졌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는 문화이고 투표는 정치이다. 남들이 하는 것에 우르르 따라가는 것 같으니깐 그런 정치적 참여를 거부한다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봤을 당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 부각된 두 개의 선거를 생각해보면 마냥 이렇게 생각하기도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알 것 같지만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이다. 두 개 다 폭력적인 다수가 소수를 눌러버렸다. 물론 미국 대선은 진 쪽이 다수이긴 했지만 각각을 구성하는 계층을 보았을 때에 이긴 쪽을 다수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또 하나 감정에서 다수였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쪽과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모두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사회적 구조, 정치적 올바름, 감히(?) 자신들과 같은 권리를 주장하는 소수자들... 이런 것에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해나간 것이었다. 

미국 대선은 경선 과정에서 상당수의 공화당 정치가들이 트럼프에게 "넌 우리와 같은 보수가 아니야!"를 외쳤다. 하지만 그 결과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역은 일어나지 않았다. 트럼프가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힐러리를 지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민들은 누가 더 적합한 후보인가보다는 결국 '우리편'을 찍고 싶어하는 감정에 충실했다. 많은 언론들이 트럼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브렉시트를 하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으며 지금 총리로서 브렉시트를 진행시키고 있는 테레사 메이도 브렉시트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털어놨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감정은 단호했다. 이대로 유로를 계속 유지할 경우 외국인 노동자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고 설상가상으로 테러리스트가 섞여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의 난민이 해저터널을 통해서 마구 밀려들어 올 것이다. 유로에 내는 돈을 우리 것으로 되돌려야 된다라고 생각한다.(투표 후에 나타났듯이 이 돈이 영국 시민들에게 돌아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는 모든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해당 자리에 더 적합한 후보, 더 적합한 법안을 선택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사람은 매사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동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전에 말했듯이 사람은 본능이 우선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고 그 본능이 충족되었을 때에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거가 원래 민주주의를 설계한 사람들이 생각했을 정책선거보다는 인기투표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좀더 좋은 인상을 주는 후보, (정책보다는 말로) 나의 불안감을 지워주는 후보,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고를 것 같은 후보에게 시민들의 표가 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각자의 숙고한 선택보다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투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며 여기에 각자가 생각하는 옳음이 들어가기는 힘들어진다. 

비행기 타고 열 시간 넘게 가야되는 곳 돌아볼 필요없이 한국을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은 불쌍한 박근혜VS불쌍한 노무현 내지 독재자 박정희VS좌빨(?) 문재인의 대결을 했었다. 정책대결이 있었는가? 그냥 서로가 미는 후보가 정당함만을 역설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더 불쌍했던(?) 박근혜가 이겼고 박근혜는 최순실의 자문(?) 하에 업무를 보았다. 많은 사람이 뽑은 결과가 이거였다. 정말 많은 시민들이 선택한 길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가면 갈 수록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이 사라져간다.

전에 <세상물정의 물리학>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면 독단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글을 썼었다. 다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서로 간에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브렉시트, 미국 대선, 한국 대선에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오히려 양쪽으로 갈려 싸우기에 딱 좋은 구도만 형성되었다. 계속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과 상대편이 악이라는 것만을 확인했고 거기에 따라 우르르 몰려갔던 것이다. 적합하니깐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인 곳이 적합한 곳이 된 것이다. 

결국 천만이 보는 영화와 천만이 선택한 투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수의 선택이 중요하게 작용하여 자신의 선택=많은 사람들이 한 선택=옳은 선택이라는 식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내용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될 수 밖에 없고 여기에 이성적인 생각은 생략해서는 안 되는 생략가능 사항이 되는 것이다. 장정일 작가는 이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숙한 사고과정과 소통이 없이 단 하루의 전투에만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처럼 나오고 결국 그 이상의 정치는 간접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극소수 기득권에 맡겨지는 천만 시민의 투표는 만천 원의 티켓을 끊고 앉아서 약 두 시간 동안의 짜릿함을 느끼고 본 후에 깊은 감명을 받기는 힘든 천만 관객의 영화와 닮아있다. 참여보다는 허공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가깝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아무 것도 없는 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대열에 합류하는 것보다는 그냥 집에 들어가서 책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전에 썼다고 링크를 올렸던 세 개의 글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링크 없이도 설명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역시 허전하다. 난 무엇을 위해 글을 써온 건지... 장정일 씨 글은 전에 잡지에서 봤을 때 진영과 다수의 폭력성을 다뤘던 것 같은데 인터넷판에서는 제목이 부수적으로 들어간 여성 문제를 다룬 것처럼 바뀌었다. <프레시안> 기사제목들의 폭력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시사IN>도 어지간히 주제를 흐리는 제목을 달려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월 28일에 썼다.




http://sciencebooks.tistory.com/1096


이 글을 읽고 나서 문득 위의 글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이번 공론화 과정은 내가 언급한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마뜩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뭘까를 생각해 봤을 때 이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번 공론화 과정은 친핵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장에서 사람들이 지구 이기주의를 자극받았을 뿐 정말 제대로 된 숙의 과정이라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반핵이 더 많았다가 이렇게 뒤집힌 이유도 생각해 보면 발전소가 세워짐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소수보다는 그냥 그 발전소가 있음으로 인해서 편의를 볼 수 있고 경남 어디에 세워지든 큰 상관이 없는 서울에서 반이나 뽑혔을 정도의 다수가 들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다수가 손익의 관점에서 바라본 결과인 것이지 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들려온 소식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앞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던 핵발전소 계획을 물리고 재생가능 에너지를 대폭 늘려서 핵발전소를 줄여나가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무려 30년대까지 내다보는 계획이 그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신고리 핵발전소 두 기의 공사는 재개된다. 과연 30년대의 모습은 어떨 것이고 그 때에 지금 이 상황은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지구 이기주의가 그 때에도 살아있을 것이란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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